NOVEL

EPISODE 05

5화. 악녀의 드레스는 검다

소문을 막지 않는다. 방향만 바꾼다.

2026.06.15 약 5분 WEB NOVEL
회차 위치
5/6
시즌
미니시즌 1 · 완결
공개일
2026.06.15
읽기 시간
약 5분
미니시즌 1 5/6

재판정 밖의 공기는 안보다 더 날카로웠다.

귀족들은 계단 아래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자마자 부채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일부러 크게 속삭였다.

“풀려난 게 아니야. 보류된 거지.”

“성녀님이 너무 착해서 덮어 주신 걸지도 몰라.”

“하지만 에단 블랙이라니. 그 이름이 왜 나왔지?”

좋다.

소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소문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방향을 틀어 주는 것.

그뿐이었다.

오스카 외조부의 마차가 계단 아래에 멈췄다.

베르크의 은빛 문장이 햇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아델라인.”

외조부는 마차 안에서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계단 주변의 귀족들이 모두 들을 만큼 또렷했다.

“베르크 공작가는 네 출석을 보증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네가 보호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베르크의 이름을 걸었다는 뜻이죠.”

외조부의 눈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열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재판정의 높은 문을 돌아보았다.

리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성녀는 늘 마지막에 나온다.

사람들이 기다릴 때. 눈물을 가장 잘 볼 수 있을 때.

나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장면의 바깥에 선다.

오늘 밤, 나는 장면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차 안에는 검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에단 블랙의 초대장.

나는 봉투를 열었다.

안쪽에는 황실 사교회의 문장과 함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첫 장이 닫히기 전, 웃으십시오.

나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웃으라.

명령도 부탁도 아닌 말.

마치 내가 어떤 결말에 도착할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허공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Social route has opened. (사교 경로가 열렸습니다.)

나는 봉투를 접었다.

“저 문장이 보이십니까?”

외조부가 나를 보았다.

“무엇을 말하는 거냐.”

“아닙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 세계는 아직 나와 리아에게만 친절하게 오류를 보여 준다.

친절하다는 건, 가장 먼저 찔러 죽이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마차가 황궁 정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첫 번째 쪽지가 도착했다.

베르크가 붙여 둔 정보원이었다.

외조부가 쪽지를 펼쳤다.

“사교가에 벌써 세 가지 소문이 돈다.”

“빠르네요.”

“첫째, 악녀가 성녀의 자비로 풀려났다.”

뻔하다.

“둘째, 에단 블랙이 악녀의 공범이다.”

나쁘지 않다.

“셋째, 황태자 전하가 성녀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멈췄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가장 위험한 건 세 번째였다.

카엘의 보호가 리아의 권력이 되는 순간, 오늘 재판의 균열은 다시 덮인다.

“정정하지 마세요.”

외조부가 나를 보았다.

“그냥 둘 겁니다.”

“이유는?”

“소문은 부정하면 상대의 문장이 됩니다.”

나는 검은 봉투 위에 손끝을 올렸다.

“오늘 밤 제가 다른 문장을 보여 주면 됩니다.”

마차가 베르크 저택에 도착했을 때, 하녀들은 이미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손목의 붉은 자국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 동정. 호기심.

셋 중 하나라도 있으면 충분하다.

사람은 무관심한 주인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오늘 밤 황실 사교회에 갑니다.”

하녀장 클레어의 손이 멈췄다.

“영애님, 오늘은 몸을 추스르시는 편이…….”

“오늘 쉬면 내일은 끌려갑니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아델라인은 창백했다.

눈 밑에는 잠을 못 잔 그림자가 있었고,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완벽한 악녀라기엔 너무 지쳐 보였다.

그러니 꾸며야 했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까지 장식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흰 드레스는 치워요.”

하녀들이 서로를 보았다.

“연분홍도, 하늘색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옷장 가장 깊은 곳을 가리켰다.

“검은 드레스.”

클레어가 숨을 삼켰다.

“사교회에서 검은색은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입는 겁니다.”

리아가 흰색으로 울 거라면, 나는 검은색으로 웃으면 된다.

성녀의 색을 빌릴 필요는 없다.

악녀에게는 악녀의 색이 있다.

하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비단이 펼쳐졌다.

은실 자수가 어깨선을 따라 흐르고, 목선은 높았다.

노출은 적었지만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필요한 것은 유혹이 아니라 존재감이었다.

오후가 지나기 전, 첫 번째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도착했다.

카엘 루시안 에르하르트.

그는 저택 응접실에 서 있었다.

리아는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하녀들의 눈이 바빠졌다.

나는 검은 드레스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내려갔다.

카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잠깐.

아주 잠깐, 그는 말을 잃었다.

나는 그 침묵을 먼저 가져갔다.

“전하께서 저택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착각하지 마라.”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널 데리러 온 게 아니다. 감시하러 왔다.”

“좋습니다.”

나는 장갑을 끼며 웃었다.

“감시는 시선이 필요하니까요.”

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 밤 사고를 만들 생각이라면 그만둬.”

“사고는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죠.”

나는 그를 지나쳐 마차 쪽으로 걸었다.

“저는 발견하는 쪽입니다.”

카엘이 뒤따라왔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무거웠고,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괜찮다.

그가 내 편일 필요는 없다.

다만 오늘 밤, 끝까지 보고 있으면 된다.

그 시선 하나가 리아의 완벽한 장면에 금을 낼 테니까.

황실 사교회장 앞에는 이미 마차가 가득했다.

등불이 켜지고, 음악이 흘렀다.

문 너머에서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계단 위에 내려앉았다.

순간, 입구의 소음이 낮아졌다.

그들은 나를 보았다.

성녀를 해친 악녀. 구속되지 않은 피고인. 검은 장미 초대장을 받은 여자.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문 앞의 시종이 내 이름을 확인했다.

그때 안쪽 홀에서 하얀 드레스가 보였다.

리아.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눈가가 붉었고, 카엘이 없는 쪽 어깨가 조금 외로워 보였다.

완벽하다.

저 장면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허공의 붉은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Final stage is loading. (최종 무대가 불러와집니다.)

나는 웃었다.

오늘 밤, 그들이 보게 될 것은 몰락이 아니다.

입장이다.

EPISODE INDEX

전체 회차

웹소설 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OST를 상징하는 달빛 침실과 검은 드레스 썸네일 Web Novel OST

회차 OST

웹소설 OST|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첫 장에서 몰락해야 했던 악녀 아델라인이 예정된 비극을 깨고 자신의 운명을 빼앗기 시작하는 순간을 담은 대표 O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