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EPISODE 03

3화. 재판은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증언은 눈물보다 먼저 재판정을 갈랐다.

2026.06.15 약 5분 WEB NOVEL
회차 위치
3/6
시즌
미니시즌 1 · 완결
공개일
2026.06.15
읽기 시간
약 5분
미니시즌 1 3/6

재판정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대리석 바닥은 사람의 얼굴을 비췄고, 금빛 의자는 앉은 사람의 권위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섰다.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어젯밤까지는 침대에 묶인 악녀였고, 오늘은 성녀를 해치려 한 피고인이었다.

다만 하나가 달랐다.

나는 아직 무릎을 꿇지 않았다.

재판정 위, 카엘 루시안 에르하르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리아가 서 있었다.

하얀 신관복.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누가 봐도 피해자였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지루할 만큼.

재판관이 의사봉을 들었다.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성녀 리아를 해치려 한 혐의에 대한 공개 심문을 시작한다.”

탕.

소리가 울리자 귀족석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꽂혔다.

악녀. 질투한 약혼녀. 성녀를 해친 여자.

그들이 속으로 붙인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웃었다.

작게.

그러자 앞줄의 귀부인 하나가 부채를 멈췄다.

좋다.

사람들은 우는 악녀보다 웃는 악녀를 더 오래 본다.

재판관이 말했다.

“고발 측은 증거를 제출하라.”

황실 서기관이 앞으로 나와 은쟁반 위의 흰 천을 펼쳤다.

찢어진 성녀의 베일.

끝자락의 붉은 얼룩.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붉은 실크 끈.

내 손목을 묶었던 끈이었다.

리아가 작게 숨을 떨었다.

카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 눈빛은 차가웠다.

믿음은 없었다.

그건 다행이었다.

갑자기 믿는 남자는 쓸모없다.

“피고인은 할 말이 있나.”

나는 베일을 보지 않고 재판관을 보았다.

“증인을 부르겠습니다.”

귀족석이 술렁였다.

카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증인?”

리아의 손끝이 굳었다.

나는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마레나.”

재판정 옆문이 열렸다.

회색 하녀복을 입은 소녀가 기사 둘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마레나.

어젯밤 내 방에 있었던 하녀.

원작이라면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사람.

오늘은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마레나는 증인석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울음은 연민을 부르지만, 침묵은 의심을 부른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건 연민이 아니었다.

“이름을 말하라.”

“마, 마레나입니다. 황궁 서쪽 별관 하녀입니다.”

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너무 늦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때로 대답보다 많은 말을 한다.

재판관이 물었다.

“어젯밤 피고인의 침실에 있었나.”

마레나는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도와주겠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증인은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마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있었습니다.”

귀족석이 다시 흔들렸다.

“피고인이 성녀의 베일을 찢었나.”

그 질문이 떨어지자 리아가 눈을 감았다.

마레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보지 못했습니다.”

정적.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재판정 전체를 갈랐다.

카엘이 마레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재판관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을 보았지.”

마레나의 손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증인은 본 것만 말하면 됩니다.”

카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의심은 나만 향하지 않았다.

마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잉크로 쓰인 명령서를 보았습니다.”

리아의 어깨가 굳었다.

재판관의 손이 멈췄다.

“명령서?”

“성녀님의 베일을 서쪽 별관 지하로 옮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객석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나는 리아를 보았다.

리아는 아직 울지 않았다.

똑똑한 여자다.

울기에는 너무 이른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그 명령서를 누가 썼지.”

마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을 들어 자신의 소매 안쪽을 더듬었다.

기사 하나가 그녀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지만, 오스카 로제 베르크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렸다.

탁.

재판정 뒤쪽에 앉아 있던 외조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기사는 물러났다.

마레나는 접힌 종이 조각 하나를 꺼냈다.

반쯤 탄 모서리.

검은 잉크.

서기관이 그것을 받아 펼쳤다.

재판관의 얼굴이 굳었다.

“읽어라.”

서기관이 망설였다.

“읽으세요.”

내가 말했다.

모두가 나를 보았다.

피고인이 증거를 재촉하는 재판.

아마 이 재판정에서는 처음일 것이다.

서기관이 낮게 읽었다.

“흰 베일은 아델라인의 방에. 붉은 끈은 손목에. 증인은 새벽 전에 지운다.”

귀족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리아가 한 걸음 물러섰다.

카엘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종이 조각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해 두었다.

아직 사랑은 아니다. 믿음도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시선이 증거로 옮겨가면, 다시 눈물만 보기는 어렵다.

재판관이 물었다.

“서명은?”

서기관이 종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없습니다. 하지만 잉크 아래에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문장이 무엇을 불러올지.

재판정의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허공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Witness statement has entered the original route. (증언이 원작 경로에 진입했습니다.)

리아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카엘은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오직 나와 리아만이 그 글자를 보고 있었다.

역시.

아직 규칙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이 갔다.

재판관이 다시 물었다.

“남은 문장을 읽어라.”

서기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잉크의 계약자는 셋.”

정적이 내려앉았다.

“첫 번째 이름은 리아 세라핀.”

리아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너무 늦었다.

“두 번째 이름은…….”

서기관의 목소리가 끊겼다.

카엘이 말했다.

“읽어.”

서기관은 고개를 숙였다.

“에단 블랙.”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재판정 뒤쪽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검은 장갑. 검은 외투. 웃고 있지 않은 입술.

그리고 계약서의 잉크와 같은 색의 눈.

남자가 천천히 재판정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리아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를 보았다.

에단 블랙.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의 문장이 다시 번졌다.

External witness has entered the trial. (외부 증인이 재판에 입장했습니다.)

나는 웃었다.

재판은 길게 끌 필요가 없었다.

진짜 무대는 이제 막 열렸으니까.

EPISODE INDEX

전체 회차

웹소설 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OST를 상징하는 달빛 침실과 검은 드레스 썸네일 Web Novel OST

회차 OST

웹소설 OST|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첫 장에서 몰락해야 했던 악녀 아델라인이 예정된 비극을 깨고 자신의 운명을 빼앗기 시작하는 순간을 담은 대표 O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