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EPISODE 04

4화. 검은 잉크의 계약서

불탄 기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색으로 남아 있었다.

2026.06.14 약 12분 WEB NOVEL

재판장은 낮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

황궁 중앙 재판정.

천장에는 금빛 태양 문장이 박혀 있었고, 양쪽 벽에는 제국을 세운 황제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바닥의 검은 대리석은 너무 잘 닦여서, 그 위에 선 사람의 표정까지 비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내가 섰다.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어제까지만 해도 침대에 묶여 있던 악녀.

오늘은 공개 재판의 피고인.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피고인이라는 자리는 꼭 무릎 꿇는 자리만은 아니다.

때로는 모두가 나를 보게 만드는 가장 좋은 무대다.

재판정 뒤편 객석에는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입은 닫혀 있었지만 눈은 떠들썩했다.

성녀를 해친 악녀. 황태자의 약혼녀. 베르크의 후계자. 어젯밤 황궁의 시계를 멈추게 한 여자.

소문은 밤새 달렸다.

그리고 소문은 늘 사람보다 빠르다.

나는 그 시선들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은 칼이 아니다.

칼처럼 쓰려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재판장 정면에는 카엘이 앉아 있었다.

황태자이자 이번 사건의 고발자.

그의 옆에는 리아가 서 있었다.

하얀 신관복. 단정한 머리. 다시 완벽해진 눈물.

어젯밤 그 방에서 보인 미움은 사라져 있었다.

성녀는 다시 성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원문을 읽었다.

번역본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스카는 내 뒤쪽 참관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가끔은 큰 소리를 낸다.

그가 데려온 베르크 기사들의 검은 장미 문장만으로도 충분했다.

재판관이 의사봉을 들었다.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성녀 리아를 해치려 한 혐의에 대한 공개 심문을 시작한다.”

나무가 대리석 위를 때리는 소리.

탕.

재판이 시작됐다.

카엘이 먼저 일어섰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재판관을 보았다.

“성녀 리아는 어젯밤 서쪽 별관 인근에서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건 직후 아델라인의 침실에서 성녀의 찢어진 베일이 발견되었습니다.”

기사가 베일을 들고 나왔다.

흰 천.

붉은 얼룩.

찢어진 끝.

아름다운 증거.

너무 아름다워서 가짜 같은 증거.

재판정에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싶어 했다.

피해자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악녀는 말해도 믿지 않는다.

이야기는 늘 그렇게 편하게 흘러간다.

나는 손을 들었다.

재판관이 나를 보았다.

“발언하라.”

“저 베일은 증거가 아니라 전시물입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카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나는 베일을 가리켰다.

“증거라면 검증해야 합니다. 전시물이라면 감상하면 되겠죠. 지금 황실은 제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재판관의 눈썹이 움직였다.

오스카의 입가가 아주 작게 올라갔다.

카엘은 낮게 말했다.

“검증은 이미 진행 중이다.”

“황실 감정관과 베르크 측 참관인이 동시에 입회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침묵은 가끔 가장 좋은 답이다.

나는 재판관을 보았다.

“첫 번째 증인을 요청합니다.”

재판관이 기록관에게 눈짓했다.

“증인 마레나를 들이라.”

문이 열렸다.

마레나가 들어왔다.

어제보다 얼굴은 더 창백했지만, 걸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양옆에는 황실 기사와 베르크 기사가 함께 섰다.

살아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첫 번째 싸움은 이겼다.

마레나는 증인석 앞에 섰다.

재판관이 물었다.

“이름과 소속을 말하라.”

“마레나. 황궁 서쪽 별관 하녀입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끊기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젯밤 내 손목을 묶은 사람이 맞습니까?”

객석이 다시 술렁였다.

마레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맞습니다.”

카엘의 얼굴이 굳었다.

리아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나는 계속했다.

“누가 명령했습니까?”

마레나의 입술이 떨렸다.

바로 그 순간 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고인 눈.

도와달라는 눈빛.

마레나는 그 눈빛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흔들렸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

“마레나.”

그녀가 내 쪽을 보았다.

“당신은 어젯밤 내게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마레나의 숨이 멈췄다.

“그 말은 아직 유효합니까?”

재판정이 조용해졌다.

사과는 죄를 인정하는 말일 수도 있고, 살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다.

마레나는 그 둘 사이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러다 말했다.

“명령한 사람은……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객석에서 낮은 실망이 흘렀다.

리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카엘이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네가 졌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질문을 끝내지 않았다.

“그럼 명령서를 받았습니까?”

마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말했다.

“증인은 답하라.”

마레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받았습니다.”

재판정이 다시 조용해졌다.

리아의 손끝이 굳었다.

나는 물었다.

“어떤 명령서였습니까?”

마레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잉크로 쓰인 봉인 명령서였습니다.”

검은 잉크.

그 단어가 떨어진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리아의 얼굴에서 색이 빠졌다.

카엘은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았다.

그는 봤다.

나는 재판관을 향해 말했다.

“서쪽 별관 지하에서 회수한 봉인 보관함을 제출해 주십시오.”

기록관이 당황한 듯 재판관을 보았다.

재판관은 카엘을 보았다.

카엘은 이를 악문 채 명령했다.

“제출하라.”

황실 기사가 봉인된 작은 철함을 들고 나왔다.

철함에는 검은 밀랍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신전의 백합 문장이 눌려 있었다.

리아가 작게 숨을 삼켰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들었다.

재판관이 물었다.

“성녀 리아. 저 문장을 알고 있습니까?”

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다시 눈물.

“신전의 봉인 문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 철함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문장은 인정하되, 물건은 부정한다.

책임은 흐리되, 결백은 남긴다.

나는 철함을 바라봤다.

허공에 문장이 떠올랐다.

Evidence route is unstable. (증거 경로가 불안정합니다.)

좋아.

불안정하다는 건, 아직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재판관이 철함을 열었다.

안에는 반쯤 탄 종이와 얇은 계약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계약서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종이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렸지만, 글자는 살아 있었다.

검은 잉크.

빛을 받자 잉크가 마치 젖은 것처럼 반짝였다.

기록관이 계약서를 펼쳤다.

그 순간 재판정의 촛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똑.

어딘가에서 시계가 멈추려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못했다.

오스카가 손에 쥔 지팡이를 바닥에 한 번 찍었다.

또각.

그 소리에 시간이 다시 앞으로 밀려났다.

기록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본 계약은 원작 경로의 안정화를 위하여, 변수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의 침묵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재판정이 얼어붙었다.

원작 경로.

변수.

침묵.

이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낯선 말이었다.

하지만 낯설다고 해서 힘이 없는 말은 아니다.

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문서는 무엇이지?”

그는 리아가 아니라 기록관에게 물었다.

기록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리아는 처음으로 눈물을 멈췄다.

나는 그 얼굴을 보았다.

성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들킨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물었다.

“서명자는 누구입니까?”

기록관은 계약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첫 번째 서명자는…… 리아 세라핀.”

객석에서 비명 같은 숨소리가 터졌다.

리아는 눈을 감았다.

카엘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번째 서명자는요?”

기록관은 더 오래 침묵했다.

재판관이 낮게 말했다.

“읽어라.”

기록관은 입술을 적셨다.

“에단 블랙.”

그 이름이 재판정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시계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천장 위 어딘가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챙.

보이지 않는 막이 금 가는 소리.

허공에 붉은 문장이 번졌다.

Critical route damage detected. (치명적인 경로 손상이 감지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이야기가 다쳤다.

리아가 갑자기 웃었다.

아주 작고, 아주 낮게.

재판정의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성녀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슬픔도, 억울함도 아니었다.

포기한 사람의 웃음도 아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리아가 말했다.

카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리아. 이게 무슨 뜻이지?”

그녀는 카엘을 보았다.

“전하께서 원하신 이야기예요.”

카엘이 멈췄다.

“내가?”

“저를 믿고, 저를 지키고, 저를 위해 악녀를 벌하는 이야기.”

리아는 눈물을 닦았다.

그 손짓은 이상하게 후련해 보였다.

“모두가 그걸 원했잖아요.”

재판정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처음으로 리아의 목소리에서 거짓이 빠졌다.

진실은 항상 선한 얼굴로 오지 않는다.

가끔은 아주 못된 얼굴로 온다.

리아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델라인 님. 당신이 첫 장에서 울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울지 않아서 미안하네요.”

“정말로요.”

그녀는 웃었다.

“당신은 울어야 했어요. 그래야 이야기가 아름다웠거든요.”

나는 계약서를 보았다.

검은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처럼 반짝였다.

“이 이야기는 원래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 질문에 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뒤편, 빈 서명란을 보았다.

그곳에는 세 번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잉크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서명하려다 지운 흔적.

나는 그 자국을 보자마자 알았다.

이 계약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 블랙은 이미 서명했다.

리아도 서명했다.

그리고 세 번째 서명자가 남아 있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 했던 이름.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내 이름.

허공에 문장이 떠올랐다.

Unsigned variable remains active. (서명되지 않은 변수가 아직 활성 상태입니다.)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좋네요.”

재판관이 나를 보았다.

카엘도, 리아도, 오스카도 나를 보았다.

나는 계약서의 빈 서명란을 가리켰다.

“제가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이 계약은 나를 침묵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내가 서명하지 않는 한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계약서 앞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오스카가 손을 들었다.

모두 멈췄다.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잉크.

원작 경로.

변수의 침묵.

웃기지 마.

나는 기록관에게 물었다.

“이 계약서를 증거로 채택해 주십시오.”

재판관은 잠시 침묵했다.

그도 이 문서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한 사실은 하나였다.

성녀의 이름이 있다.

에단 블랙의 이름도 있다.

그리고 피고인의 침묵을 요구하는 문장도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재판관이 의사봉을 들었다.

탕.

“계약서를 증거로 채택한다.”

그 순간 재판정 뒤쪽 문이 열렸다.

아무도 부르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 코트.

검은 장갑.

그리고 계약서의 잉크와 같은 색의 눈.

그는 재판정 전체를 둘러본 뒤 내게 시선을 멈췄다.

“늦었습니까?”

낯선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에단 블랙.

리아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카엘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오스카는 지팡이를 바닥에 세웠다.

나는 에단을 보았다.

“아니요.”

나는 계약서를 들어 보였다.

“마침 당신 이름을 읽던 참입니다.”

에단 블랙은 웃었다.

“그럼 증언하기 좋은 타이밍이군요.”

허공의 붉은 문장이 다시 흔들렸다.

Critical route damage detected. (치명적인 경로 손상이 감지되었습니다.)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이어졌다.

External witness has entered the trial. (외부 증인이 재판에 입장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좋아.

이제 진짜 증인이 왔다.

웹소설 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OST 유튜브 썸네일 Web Novel OST

EPISODE OST

웹소설 OST|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첫 장에서 몰락해야 했던 악녀 아델라인이 예정된 비극을 깨고 자신의 운명을 빼앗기 시작하는 순간을 담은 대표 O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