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EPISODE 04

4화. 악녀는 구속되지 않는다

믿음은 흔들리지만, 증거는 남는다.

2026.06.15 약 5분 WEB NOVEL
회차 위치
4/6
시즌
미니시즌 1 · 완결
공개일
2026.06.15
읽기 시간
약 5분
미니시즌 1 4/6

에단 블랙이 재판정에 들어온 순간, 사람들은 동시에 숨을 삼켰다.

검은 외투. 검은 장갑. 그리고 반쯤 탄 명령서의 잉크와 같은 색의 눈.

그는 재판정 한가운데까지 걸어와 멈췄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남자는 초대받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재판관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대가 에단 블랙인가.”

에단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검은 잉크의 계약자, 두 번째 서명자라는 말이 사실인가.”

귀족석이 얼어붙었다.

리아의 손이 카엘의 소매를 붙잡았다.

카엘은 리아를 떼어 내지 않았다.

역시.

그는 아직 리아의 곁에 있었다.

나는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나를 믿는 남자라면, 다음 장에서 또 갑자기 등을 돌릴 테니까.

에단이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짧은 한마디가 재판정을 갈랐다.

리아가 작게 떨었다.

그 떨림은 아름다웠다.

피해자처럼 보이기에는 충분했고, 거짓말처럼 보이기에는 조금 늦었다.

“저는 모르는 계약이에요.”

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이에요, 전하. 저는 그런 이름을 쓴 적이 없어요.”

카엘의 시선이 내게 박혔다.

차가웠다.

“아델라인.”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것까지 네가 준비한 연극인가.”

나는 웃지 않았다.

여기서 웃으면 악녀가 된다.

울면 리아의 아류가 된다.

그러니 나는 가장 지루한 표정을 골랐다.

재판정에서 가장 강한 표정.

당연히 이길 것을 아는 얼굴.

“전하.”

나는 천천히 말했다.

“제가 준비했다면, 이렇게 반쯤 태운 종이 조각 하나에 기대지 않았을 겁니다.”

카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럼 뭘 원하지.”

“유죄 판결을 멈추는 것.”

귀족석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 건가?”

재판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백은 나중에 증명해도 됩니다.”

그 말에 리아가 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겁먹은 성녀의 얼굴이 아니라, 계산을 다시 시작한 여자의 얼굴로.

나는 그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제가 구속되면, 증인은 사라지고 명령서는 불타고 베일은 다시 성녀의 눈물 아래 묻히겠죠.”

재판정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제 눈물이 아닙니다.”

나는 은쟁반 위의 찢어진 베일을 보았다.

“증거 보전입니다.”

허공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Trial route is diverging. (재판 경로가 분기됩니다.)

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보인다.

그녀도 저 문장을 보고 있었다.

카엘은 보지 못했다.

그는 나와 리아 사이에 흐르는 침묵만 보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보이는 눈물도 힘을 잃는다.

재판관이 서기관에게 명했다.

“명령서 조각과 베일, 붉은 끈을 봉인하라. 검은 잉크의 성분도 확인한다.”

리아가 급히 말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예요. 제가 왜 이런 자리에서 다시 의심받아야 하죠?”

그 말은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피해자가 아니라, 재판의 방향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성녀님.”

리아가 입술을 다물었다.

“저는 성녀님이 범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누군가 성녀님을 이용했을 수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귀족석의 공기가 바뀌었다.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몰아붙이지 않는다.

대신 더 넓은 덫을 놓는다.

리아가 피해자라면, 그녀는 내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

리아가 공범이라면, 더더욱.

카엘이 낮게 말했다.

“말장난은 그만해라.”

“말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그를 보았다.

“전하께서 성녀님을 믿고 싶으시다면, 더더욱 오늘 판결을 서두르면 안 됩니다.”

처음으로 카엘이 대답하지 못했다.

리아를 지키고 싶다면 증거를 덮을 수 없다.

증거를 덮으면 리아를 지킨 것이 아니라, 리아를 의심받게 만든다.

그 모순의 틈에 내가 서 있었다.

나는 무죄를 구걸하지 않았다.

상대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었다.

재판관이 의사봉을 들었다.

“본 심문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탕.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에 대한 즉시 구속은 보류한다.”

귀족석이 터졌다.

“보류라고?”

“그 악녀가 풀려난다는 말이야?”

“성녀님을 해쳤는데?”

나는 그 소리들을 들었다.

악녀. 피고인. 살아남은 여자.

이름이 많아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름이 많은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오스카 외조부의 지팡이가 뒤쪽에서 조용히 바닥을 쳤다.

탁.

“베르크 공작가는 피고인의 출석을 보증한다.”

그 한마디로 재판정의 소음이 잘렸다.

베르크의 이름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이름을 방패가 아니라 계단으로 쓸 생각이었다.

리아가 퇴장하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젖어 있지 않았다.

“아델라인 영애.”

나는 멈췄다.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리아가 아주 작게 웃었다.

“이제 모두가 당신을 볼 테니까요.”

나는 그제야 웃었다.

“그래서 좋은 건데요.”

리아의 눈이 굳었다.

“보이는 곳에서 이기는 게 훨씬 편하거든요.”

카엘이 리아의 뒤에서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음이 없었다.

다만 하나가 달랐다.

그는 이제 나를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널 믿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

“좋은 판단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믿음은 흔들리지만, 증거는 남으니까요.”

카엘의 시선이 내 손목에 닿았다.

붉은 실크 끈이 남긴 자국.

그가 아주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이면 충분했다.

로맨스는 믿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의심이 더 오래 사람을 붙잡는다.

재판정 문이 열렸다.

찬 공기 대신 향이 들어왔다.

검은 장미 향.

에단 블랙이 내 앞에 검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검은 장미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 사교회 초대장입니다.”

나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초대받을 자격이 있나요?”

에단이 처음으로 웃었다.

아주 느리게.

“오늘 이후로 제국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여자가 되셨으니까요.”

귀족석의 시선이 다시 내게 모였다.

재판복. 붉은 손목. 검은 봉투.

완벽하게 망가진 악녀의 차림.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어울렸다.

허공에 붉은 문장이 번졌다.

Public stage has been unlocked. (공개 무대가 열렸습니다.)

나는 검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는 바뀌었다.

다음엔 내가 입장할 차례였다.

EPISODE INDEX

전체 회차

웹소설 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OST를 상징하는 달빛 침실과 검은 드레스 썸네일 Web Novel OST

회차 OST

웹소설 OST|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첫 장에서 몰락해야 했던 악녀 아델라인이 예정된 비극을 깨고 자신의 운명을 빼앗기 시작하는 순간을 담은 대표 O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