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1
1화. 첫 장에서 웃은 악녀
첫 장에서 죽어야 했던 악녀가, 첫 장에서 웃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묶여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실크 끈. 목에는 차가운 보석 초커. 발끝에는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는 흰 베일이 떨어져 있었다.
찢어진 성녀의 베일.
끝자락에는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여긴 내가 어젯밤까지 살던 방이 아니다.
나는 한서윤이 아니다.
어젯밤까지 나는 야근을 끝내고 돌아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알람을 여섯 시 반에 맞추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낯선 침대 위에 묶여 있었고, 바닥에는 피 묻은 성녀의 베일이 떨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니었다.
맑고 낮고, 지나치게 우아한 목소리.
그 순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철이 부딪히는 소리. 하녀들이 숨을 죽이는 기척. 그리고 낮은 목소리.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전하.
그 단어 하나에 머릿속이 갈라졌다.
소설 《성녀가 버린 밤》.
첫 장. 황태자의 약혼녀. 상처 입은 성녀. 찢어진 베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가는 악녀.
아델라인 로제 베르크.
황태자의 약혼녀. 베르크 공작가의 외동딸. 원작에서 첫 장을 넘기기 위해 몰락하는 여자.
나였다.
아니.
지금부터는 내가 되어야 하는 여자였다.
문이 열렸다.
찬 공기와 함께 검은 제복의 남자가 들어왔다.
카엘 루시안 에르하르트.
제국의 황태자. 원작의 남자주인공.
그의 뒤에는 흰 신관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리아.
원작의 성녀.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고,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 억울하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 모두가 지켜줘야 할 사람.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거슬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보다 먼저, 그녀의 머리를 보았다.
베일이 없었다.
그리고 리아의 시선은 아주 짧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침대 아래.
찢어진 베일.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봤다.
카엘이 말했다.
“아델라인.”
약혼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죄인으로 확정한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네 죄를 인정해라.”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 앞에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하녀들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이 방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리아는 피해자. 카엘은 심판자. 나는 가해자.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베일은 증거.
나는 손목을 움직였다.
붉은 실크 끈은 보기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진짜로 제압하기 위한 매듭이 아니었다.
보기 좋게 묶은 것.
무력한 죄인처럼 보이게 하려는 장식.
나는 천천히 매듭을 풀었다.
실크 끈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하녀 하나가 숨을 삼켰다.
기사 하나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움직이지 마라.”
나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섰다.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몸이 아주 조금 휘청였다.
이 몸은 내가 알던 몸이 아니었다. 호흡도, 무게중심도, 손끝의 감각도 달랐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풀어도 된다고 했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내려다보았다.
“묶으실 거면 제대로 묶으셨어야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리아가 작게 말했다.
“아델라인 님…….”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걸 내려놓으십시오.”
“왜요?”
나는 베일을 손끝에 걸어 들어 올렸다.
얇은 흰 천이 촛불 아래서 흔들렸다.
붉은 얼룩이 선명했다.
“증거라면서요.”
카엘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베일을 자세히 보았다.
찢어진 자리는 거칠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사람이 잡아당겨 찢은 흔적치고는 방향이 너무 일정했다.
붉은 얼룩도 마찬가지였다.
피라면 천을 따라 스며야 했다.
그런데 이 얼룩은 위에 얹힌 것처럼 남아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을 그냥 넘겼다.
성녀의 베일이 찢어졌고, 그 곁에 아델라인이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독자들은 리아를 동정했고, 카엘의 분노를 이해했고, 아델라인의 몰락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달랐다.
이건 증거가 아니었다.
소품이었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성녀를 해치려 한 증거다.”
“이게요?”
나는 베일을 들어 보였다.
리아의 손끝이 멈췄다.
아주 잠깐.
하지만 충분했다.
“찢어진 베일 하나로 공작가의 후계자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고요?”
카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말을 조심해라.”
“조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아직 조작이라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공기가 얼어붙었다.
기사들의 손이 동시에 검집으로 향했다.
리아가 작게 숨을 삼켰다.
카엘의 턱이 굳었다.
“네가 리아를 해치려 했다는 증인은 있다.”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요.”
침묵이 길어졌다.
긴 침묵은 때때로 대답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원작에서 증거는 나중에 나온다.
정확히는, 나중에 맞춰진다.
그때는 이미 아델라인이 파혼당하고, 공작가가 압박받고, 독방에 갇힌 뒤였다.
먼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다음 증거를 맞춘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그 몰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게 원작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렇게 당할 생각이 없었다.
“왜요?”
나는 카엘을 똑바로 보았다.
“증인이 없습니까?”
카엘의 눈빛이 낮아졌다.
“네가 감히 황실 앞에서—”
“황실 앞이라서 묻는 겁니다.”
내 말에 방 안의 공기가 흔들렸다.
하녀들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기사들은 명령만 기다렸다. 리아는 눈물 고인 눈으로 카엘을 올려다봤다.
완벽한 무대였다.
누구도 내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알기 쉬웠다.
이 방 안의 모두가 원하는 결말이 같다는 뜻이니까.
나는 베일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하얀 천. 붉은 얼룩. 찢어진 끝.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래서 더 우스웠다.
“제가 정말 성녀님을 해치려 했다면, 공개 재판을 여세요.”
카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황실의 명예를 더럽힐 셈이냐.”
“아니요.”
나는 웃었다.
“황실의 명예가 더러워져 있는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순간, 기사 하나가 검을 반쯤 뽑았다.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목이 서늘했다. 손끝이 떨렸다.
이 세계에서 검은 장식이 아니었다.
한마디 잘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선명한 것이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이야기도 움직인다는 감각.
현실의 한서윤은 늘 안전했다.
실수하면 혼났고, 밀리면 야근했고, 버티면 다음 달 월급이 들어왔다.
그 세계에서 나는 누구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잘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선택하면 장면이 바뀐다.
카엘은 차갑게 명령했다.
“아델라인을 끌고 가라.”
기사 둘이 다가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끌고 가셔도 됩니다.”
기사들의 걸음이 멈췄다.
카엘의 시선이 내게 박혔다.
나는 베일을 손에 쥔 채 말했다.
“단, 제가 이 방에서 나가는 순간 베르크 공작가에는 연락이 들어갈 겁니다.”
“협박인가?”
“아니요.”
나는 똑바로 말했다.
“정치입니다.”
처음으로 카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베르크 공작가.
제국 군수권의 절반을 쥔 가문. 황실이 전쟁을 준비할 때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집안.
원작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황태자의 분노. 성녀의 눈물. 찢어진 베일 하나.
그걸로 공작가 하나가 무너진다니.
책 속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 진짜 세계라면 이야기는 달라야 했다.
“저를 재판 없이 감금하면, 베르크 공작가는 황실의 공식 설명을 요구할 겁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성녀를 해쳤다는 증거가 이 베일 하나라면, 더더욱요.”
카엘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네가 베르크를 등에 업고 황실을 압박하겠다는 뜻이냐.”
“전하께서 황실을 등에 업고 저를 압박하고 계시니.”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제 것을 쓰는 것뿐입니다.”
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델라인 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상처받은 사람처럼 낮고, 조심스러웠다.
“저는 이런 일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제야 리아를 바라봤다.
리아는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사람은 정말로 두려우면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리아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젖은 눈동자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흔들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경계.
좋다.
이제야 장면이 살아났다.
“리아 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아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카엘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만해라, 아델라인.”
나는 웃었다.
“전하께서는 참 이상하시네요.”
“뭐?”
“증거가 있다면서 제대로 검증하지는 못하시고, 피해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가장 좋은 순간마다 울고.”
리아의 입술이 아주 작게 굳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나는 손에 쥔 베일을 접지 않고 그대로 들어 보였다.
“공개 재판을 여세요.”
카엘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조건을 말할 처지라고 생각하나?”
“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는 아직 죄인이 아니고, 베르크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니까요.”
방 안의 공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카엘은 나를 죽일 수 있다. 감금할 수도 있다. 이 방의 사람들에게 침묵을 명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이곳이 소설이 아니라면.
아직 법과 가문과 권력이 살아 있는 세계라면.
나는 그 틈을 찔러야 했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재판을 열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살아남으려고 여는 게 아닙니다.”
나는 리아를 보았다.
“확인하려는 겁니다.”
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정적.
촛불이 흔들렸다.
나는 이 순간 원작의 문장을 떠올렸다.
아델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녀의 침묵을 무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웃기지 마.
침묵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침묵하면 죄가 된다.
나는 카엘을 향해 말했다.
“증인을 세우세요. 증거를 가져오세요. 신전의 기록이든 황실의 보고서든 전부 공개하십시오.”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제 증인을 세우겠습니다.”
리아의 숨이 아주 얕게 멈췄다.
나는 그 반응을 봤다.
역시.
카엘이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나는 대답하기 전,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사들. 하녀들. 황태자. 성녀.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방의 주인공은 원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첫 장을 넘기기 위한 장식이었다. 독자가 성녀를 동정하게 만들기 위한 예쁜 악역. 황태자의 정의를 빛내기 위해 추하게 무너지는 이름.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서윤으로 살던 나는 누구의 이야기도 바꾸지 못했다.
아침 알람을 끄고, 출근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지친 얼굴로 돌아와 다시 잠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나는 아델라인이었다.
첫 장에서 끝나야 하는 여자.
그러니까 더 웃겼다.
끝나야 할 사람이 끝나지 않으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에단 블랙.”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리아의 얼굴에서 피가 사라졌다.
연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카엘이 리아를 돌아봤다.
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똑.
방 안 어딘가에서 시계 초침이 멈췄다.
이어 복도 끝에서 또 다른 시계가 멈췄다.
똑.
똑.
똑.
황궁의 모든 시계가 같은 순간 숨을 삼켰다.
촛불이 길게 흔들리고, 창밖의 밤이 유리처럼 굳었다.
허공에 문장이 떠올랐다.
The story has detected an error. (이야기가 오류를 감지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오류가 맞다.
이 세계는 나를 잘못 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Web Novel OST EPISODE OST
웹소설 OST|악녀는 첫 장에서 웃었다
첫 장에서 몰락해야 했던 악녀 아델라인이 예정된 비극을 깨고 자신의 운명을 빼앗기 시작하는 순간을 담은 대표 OST입니다.